벌써 마지막 날입니다. 작년 연말에는 독일에서 글을 적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2024년은 제게 정말 감사한 일이 많았던 해입니다. 특히, 올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현솔과 도언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장 크네요. 더불어 꾸준히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도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
오늘은 제목처럼 연말 회고를 적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회고를 읽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사전맥락이 없다면 이해가 어렵죠. 재미도 없을 수 있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6가지의 회고를 짧은 맥락과 함께 적어봤습니다.
2024년도 고생하셨습니다 :)
Waltz No. 1 Op.6 Collapse - Hikaru Shirosu
1. 불안정함을 탈출하는 방법
1월의 나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디스콰이엇은 여러 이유로 지쳐있었고 한 눈에 봐도 휴식이 필요해보였다. 결국 1월 한 달을 안식을 위한 휴식기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즉시 "고민여행"을 떠나기 위해 독일 비행기 티겟을 끊었다. 나애게 독일은 많은 꿈을 꾸게 해준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인데, 당시의 나는 프로덕트와 한국 IT 씬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디스콰이엇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아래의 질문에 답해야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불안정함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직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리고 곧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한 번에 정리되었는데, 괴테의 생가를 방문했을 때다.
괴테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덕분에 유년기 때부터 장군, 화가, 음악가 등과 같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예술, 수학, 과학, 처세와 같이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하는 '본질적인 것'들에 계속해서 노출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경험/통찰로 훗날 괴테는 예술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계열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본질적인 학문에 대한 이해는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도록 지지대가 되어준다. 하지만 반대로 불안할 때면 본질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다. 당장 필요한 통찰을 제공하지 못해 쓸모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문은 서로 유사성을 지닌다. 마치 인간의 핏줄과 강줄기가 비슷하게 생긴 것처럼, 하나의 개념은 다른 학문의 다른 개념과 유사성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기초학문에 대한 집착은 곧, '유연한 직관의 형성'으로 볼 수도 있는데, 반대로 기초학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유연한 직관을 발휘하기 어려워 학습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
어떻게 괴테는 그렇게 많은 학문을 통달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답을 본질적인 학문에 대한 높은 이해와, 학문 간의 유사성을 발견하며 빠르게 배워나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괴테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다빈치, 스티브 잡스 등과 같이 통합적 사고에 능한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후에 나는 특히 심리학과 역사에 깊이 몰입하며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후 디스콰이엇에서 창업가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때 큰 도움이 되었다.
2. 호기심과 조급함의 차이, 모방의 힘(Imitation)
통합적 사고가 불안정함을 해소했다면, 그 다음은 끊임없는 경험과 학습이 필요하다. 이때, 호기심은 강력한 동력이 되어준다.
괴테의 집을 보고 온 것이 꽤 임팩트가 있었는지, 2~3월에 적은 글을 보면 제너럴리스트와 호기심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휴가 이후에 팀 인원 수가 줄어들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임팩트를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이 약간의 조급함을 만들기도 했다.
호기심과 조급함은 한끗 차이다. 더 쉽게 풀어보면, 필요에 의한 선택과 불안에 의한 선택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다양한 분야를 학습하고 넘나들며 임팩트를 내야한다는 생각이 만드는 조급함은 엄연히 불안에 기반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이 나쁜걸까?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생각정리를 했다.
나는 계속해서 초보자가 되는 불편함에 익숙해져야한다. 제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 이때 적절한 수준의 조급함은 훌륭한 불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번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그 이후 과정은 호기심이 리드한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통합하며 나만의 원칙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당시 내가 기존에 하던 일은 커뮤니티/프로그램 운영이었고, 마케팅, 컨텐츠, 개발로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급함은 나에게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 필요함을 상기시켰고, 나의 호기심은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즐거울 수 있도록 도왔다. 결과적으로 새롭게 도전한 컨텐츠 마케팅은 디스콰이엇 역대 가장 높은 지표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습득하다보면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데, 바로 올바른 의사결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습득했지만 막상 의사결정을 내리려니 그래서 옳은 방향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나는 롤모델을 정하고 모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래의 원칙에 따라 질 높은 모방을 해봤다.
배우고 싶은 명확한 패턴 찾기
절대 모든 것을 따라하려고 하지 말자. 16GB 램이 소화하던 일을 4GB 램이 하려고 하면 과부하가 온다. 의사결정 방식이든, 삶의 루틴이든 하나의 명확한 패턴을 정의하고 거기에 집중하자
적합한 롤모델 찾기
'업계에서 유명한 일잘러'를 찾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사람마다 쉽게 바뀌지 않는 기질이 있는데, 만약 나랑 다른 기질의 사람을 imitate하려고 한다면, 상대방의 강점도 배우지 못하고 나의 강점도 극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3. 반복의 가치, 퀄리티 있는 실행만큼 중요한 것
이후 5~7월은 새롭게 배우고 정보를 연결하며 시너지를 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던 시기였다. 개발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개발자의 유입을 늘리기 위해, 샘플코드를 포함하는 AI 워크플로우 자동화 컨텐츠를 발행했고, 벨로그, 트위터, 링크드인 등에서 디스콰이엇 역대 최다 바이럴을 만들었다. 이에 힘 입어 이후에 발행한 컨텐츠 모두 기존 수치를 상회하는 유입량을 기록했다.
이때의 경험은 내가 새로운 정보를 얻고 연결하는 것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유입량 증가를 위해 3개월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컨텐츠를 발행했는데, 언젠가부터 권태감이 오기 시작했다. 컨텐츠 하나를 발행할 때마다 약 5,000명 정도가 꾸준히 유입되었고, 이를 단순히 반복한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지루함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텍스트 콘텐츠는 유저들이 소비하기 어려워 퀴즈나 게임 같은 형태로 전환하자는 내부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발행을 중단했다. 하지만 그 당시 지루함에 대해 명확히 해결하지 못하고 상황을 넘긴 것 같아 아직도 불편함이 남아 있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런 깨달음이 있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끝을 맺는 것은 즐거움과 설렘을 준다. 시작과 끝은 우리의 주의력이 지금과는 다른 방향을 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주는 즐거움과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수행되는 과정을 수직선으로 표현한다면 시작과 끝은 양 끝의 점에 불과하다. 당연하게도 중간과정에 가장 길고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이때 행동의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행동의 주체가 지치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킬 수 있었다.
4. 무엇이 나를 지속하게 만드는걸까?
이 시점에 읽은 "Be Sincere—Not Serious" 글은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해당 글을 인용해 내용을 적어봤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두 가지 종류의 게임을 한다.
유한한 게임 : 이기기 위해 플레이. 정치,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플레이어는 엄격한 규칙을 따르고, 경계를 늘 인식하며, 승자와 패자를 정해 공표하는 활동을 반복
무한한 게임 : 게임을 계속하기 위한 게임. 진정성있는 상호작용이 동력
만약 제품개발을 하는 초기창업가라고 가정하면, 시장의 경쟁자들 속에서 살아남는 유한한 게임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제품개발을 단지 나의 '이상실현'이라는 무한한 게임의 일부라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가 제품개발을 하는 이유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제품개발이라는 게임을 '계속하는 것'인 셈이다. 물론 모든 플레이에 최선을 다하되, 불필요한 부정적 감정에 매몰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처음 컨텐츠를 발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제품에 대해 잘 몰랐지만 유익한 사실들을 전달해 영감을 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유한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초심은 잊었고, 오로지 다른 수많은 IT 컨텐츠를 이기기 위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만약 당시의 내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승리보다 지속적인 컨텐츠 발행으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에 더 집중했다면,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 감정에 매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도왔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10년 뒤, 20년 뒤의 어떤 모습이기를 묻는다면, 제품개발이라는 게임을 잘 지속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답한다.
5. 와우 모먼트를 만드는 방법
나는 외부의 다양한 팀과 협업해 B2B향 컨텐츠도 만들었는데, 특히 아산나눔재단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협력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와우 모먼트를 주는법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짧은 사례를 들어 정리했다
올해 초, 아산나눔재단은 디스콰이엇을 통해 배너광고를 진행했다. 해당 캠페인은 다른 광고들에게 비해 더 좋은 성과를 냈지만, 몇 가지를 개선하면 앞으로의 캠페인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몇 가지 개선안을 포함시켜 전달했다.
나중에 현솔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아산나눔재단이 해당 리포트를 받아보고 와우했다고 했다. 그들이 주로 설득해야하는 집단은 초기 스타트업인데, 재단이다 보니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인사이트를 원했으나 얻기 어려웠다고 했다. 디스콰이엇은 이후에도 아산나눔재단의 광고 컨텐츠를 기획했고, 메타/링크드인 보다 높은 효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정리하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아래의 요소를 조절해가며 와우 모먼트를 줄 수 있다.
시간 : 기대치보다 더 빨리 해준다, 더 오래 해준다 등
질 : 기대치보다 더 질 좋은 무언가를 전달한다
양 : 기대치보다 더 많은 양의 무언가를 제공한다
그리고 위의 3가지 요소를 중첩시켰을 때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더 빠르게 많은 양의 무언가를 제공하거나, 더 질 좋은 정보를 많이 제공하거나.
또한, 모든 용어 정의에 비교급이 포함되기 때문에 기대치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계획을 성공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방의 기존 경험을 상회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필요 이상의 힘을 주는 것도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좋은 경험을 주고 싶다면, 이전 경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대화를 하게 된다.
6. 정보의 교차점
이쯤에서 마무리하려 했으나, 유난히 이번 2024년이 내게 소중했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그리고 내가 정보의 교차점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보의 교차점이란, 많고 다양한 정보가 교차하는 지점을 말한다. 관료제가 만들어낸 개념이기도 한데, 정보의 교차점에 있다면 넓은 스펙트럼의 경험과 통찰을 직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다. 아마 디스콰이엇을 운영했던 경험으로 하여금, 한국 스타트업 씬에 대해 양질의 통찰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의 경험은 내게 좋은 성장을 원한다면 끊임없이 정보의 교차점에 서 있으라고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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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