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교육창업을 하기 이전에 독일의 교육자들을 인터뷰하고 우연히 방문했던 Rüdesheim의 포도밭. 많은 일이 있었던 2023년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와서 한참을 앉아서 생각정리를 했다.
We’re Still Here - Brother Alfred
낙관적이지 못한 사고
디스콰이엇에 합류하기 전에는 작년 여름에 함께 창업한 팀과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유의미한 성과가 나왔다. 교육제품을 만들었을 때는 인근 학교로 시작해 입소문으로 교육청과 대학 영재교육원까지 나아갈 수 있었고, 커피유통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1달만에 중국의 생두를 가져올 수 있는 루트와 협력업체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한 번 일이 안 풀리기 시작하자 급격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나의 목표 KPI(매출)에만 집중했고, 팀의 화합과 개인의 성장과 같은 부가적인 목표의 우선순위를 낮췄다. 우선 매출만 잘 찍으면 부가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큰 오산이었다. 이런 사고는 팀의 경직도를 높였고, 팀원들의 동기부여시키지 못했다. 결국 기여도의 차이, 비전 얼라인의 차이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비즈니스가 아닌 팀을 돌보지 못해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다소 비관적이었던 당시의 나는 팀과 충분한 대화를 거친 다음,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그때 너무 안타까웠고, 스스로 자책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상태나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낙관에 대해 처음 고민해본 것은 디스콰이엇에 합류하고 현솔님과 1on1을 하면서 부터다. 현솔님은 비관적인 사고를 하는 나에게 과정은 현실적이고 적절한 비관이 섞여야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낙관을 유지하는게 오래 일할 수 있는 태도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장기적으로 낙관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 2가지를 생각해봤다. 이걸 이해하고 해결하면 낙관과 비관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내 주변에서 관측할 수 있는 현상들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있다. 그래서 이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 호기심과 불안함을 느끼는데 불안함의 비중이 더 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기심의 비중을 키우면 된다. 현상에 대한 이해를 하려는 욕망은 너무 좋은 현상이고, 이를 긍정적인 호기심으로 바꿔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것에 사용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두 번째로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감 역시 낙관적인 사고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나는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는데, 친구들 사이에서의 cancel culture을 피하기 위해 '옳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리고 이게 트리거가 되었고, 주변으로부터 유대감을 잘 느끼지 못할 때면 당장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야한다는 강박이 강하게 생긴다. 이는 장기적으로 낙관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선의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생각하고, 관계에 있어 추측하기보다 대화를 더 많이 할수록 해결될 수 있다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년에는 꼭 극복하고 싶다.
배우는 즐거움
낙관적인 사고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면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왜 실패하면 자책할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봤다.
우선, 사람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감정투자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가설이 틀리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마치 내가 틀리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가설은 틀릴거라 생각하고 핵심만 남긴 가설을 빠르고 돌릴 수 있어야한다.
다음으로 직관에만 의존한 가설이라 실패해도 배울 수 있는게 없을 때이다. 스타트업의 여정은 많은 함수를 정의하고 풀어가는 여정인데, 변수 정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데다가 결과까지 좋지 않다면 당연히 부정적인 감정이 들 수 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직관과 탐구의 비율을 잘 정의해야한다. 레퍼런스가 많다면 그걸 기반으로 직관을 발휘해볼 수 있고, 반대의 경우라면 적당한 탐구의 시간을 가진 다음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문제와 가설의 controlability를 높이면 되는 것 같다.
우정과 사랑
장동선 박사님의 말씀 중에서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인생에 기둥이 하나밖에 없으면 그게 무너졌을 때 삶도 무너집니다. 만약 일이 삶의 전부라면 그 일이 무너졌을 때 삶도 함께 무너질 수 있어요.
지금 나의 삶은 나와 일로 구성되어있다.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디스콰이엇에서 일하고 있고, 여행과 같은 많은 경험을 통해 나의 멘탈모델을 업데이트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요소는 오히려 노이즈라 생각하며 멀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정과 사랑은 안정감과 원동력을 제공하고,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해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의 삶에 있어 꼭 필요한 요소라 생각되었다. 또한 우정과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진홍님과 1on1을 하면서도 많이 굳혀졌는데, 여담으로, 수천만년 동안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을 거스를 수 없다는 말에 납득되기도 했다.
우정과 사랑은 팀과의 관계에서도 정의될 수 있다. 나는 아직 팀과 함께 일한 경험이 많지 않은데, 리더가 아닌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팀의 경험은 더 적어서 다소 긴장하며 지냈었다. 그런데 2주 정도 팀원들과 떨어져서 지내다보니 팀을 더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함께 힘든 길을 걸어가야하는 동료들에게 내가 마음을 너무 열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항상 나와 일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우정과 사랑을 다져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을 바치는 세 가지 기둥으로 일, 나, 사랑으로 정의했다. 앞으로의 플랜은 이 3가지를 기준으로 세워나가보려 한다.
여행
나는 매년 주기적으로 해외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른 문화권에 오면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게 되어 스스로 메타인지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좋아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래서 관광보다는 현지인처럼 지내려하는 편이다.
올해는 3개의 나라에 있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자연 속에서 행복과 웰니스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재미있었던 것은 코스타리카 기술부 장관과 만나서 들은 이야기인데, 기술부가 집중하는 제1아젠다가 국가 구성원의 웰니스이라는 점이었다. 아직 의료 쪽 DT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DT를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기술을 활용해 구성원의 웰니스를 증진시키겠다는 목표였다. 말만 그럴싸한게 아니라 세부 계획을 듣고 나니 납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가 큰 협동조합들에 의해 굴러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날 때 소속된 협동조합이 있고, 대학에 가지 않는 이상 소속된 협동조합을 굴리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은 협동조합 속에서 서로 돌보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시급은 한국보다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물가가 한국과 비슷하고, 월급은 받자마자 바로 소진한다. 저축이라는 개념이 없다.
지금 와 있는 독일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나라다. 고등학생 때 독일 교육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하나로 친구들과 독일을 여행했고, 해외에서 단기 아파트를 계약해 처음 돈을 벌어본 나라도 독일이었다. 독일은 나에게 독립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고,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성향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독일 철학자들은 이론에 기반해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주로 경험주의 보다는 이론주의에 가까우며,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 간결함과 실용성, 배려에 집착하는 산업디자인을 좋아하는데, IBM ThinkPad를 디자인한 리차드 새퍼Richard Sapper, 산업디자인하면 빠질 수 없는 디터람스Dieter Rams 까지 모두 독일 사람들이라 독일은 여러모로 많은 영감을 주는 나라다.
앞으로
올해는 전진보다는 변화와 수렴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한 해였다. 많은 전진을 하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이었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니 더 큰 전진을 위해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앞으로는 일, 사랑, 나 각각의 역량을 키워가며 2024년을 보낼 생각이다.
가장 먼저 결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성공을 위해서는 보통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통제할 수 있는 변수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의 화합으로 만들어지는데, 다시 말해 통제할 수 있는 변수를 가능한 최대한 최적화 시켜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통제할 수 있는 변수에는 지적 수준과 업무 역량이 있다. 이는 도언님의 회고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으로 시작하려 한다. 독일은 이런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 것 같다 ㅎㅎ
다음으로 업무 역량에 대한 부분인데, 장기적으로는 제너럴리스트를 지향하되, 우선 내가 좋아하고 자신있는 것 중에 팀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부터 더 키워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팀의 비전과 나의 비전을 얼라인시키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여하는 환경에 있을 때 팀도 나도 잘 성장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걸 찾으려면 우리 팀이 잘 못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 중에서 내가 잘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연말이 될수록 스스로 지치는 바람에 나의 진정성이 많이 부족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내년에는 내가 가진 에너지의 케파를 키우는 일과 부정적인 에너지를 풀어내는 일을 병렬적으로 잘하면서 문제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다. 당장 내 주변의 사람들과 문제에서부터 차근차근 꾸준히 풀어나가다 보면 풍요로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거라 믿는다.
항상 주변에 존재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민교님의 회고 참 좋네요. 24년에도 파이팅해요!!
오와…‘주어진 상황에 따라 직관과 탐구의 비율을 잘 정의해야한다’ 부분에서 지금 고민하고 있는 제 문제의 답을 문장으로 본 느낌..! 끝까지 고민해서 결국 해결하시는 모습이 진짜 멋지고 저에게도 자극이 되네요 이 글은 두고 두고 읽어서 제 2024년에도 적용해봐야겠어요 ㅎㅎ 그리고 민교님의 차근차근 꾸준히 나아갈 이야기도 응원하겠습니다! 햅삐뉴이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