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전자기기와 떨어져 책만 붙잡고 있었더니 깊은 생각을 오래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책을 읽으며 인상깊었던 부분과 제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Bon Iver - __45__
1. 좋은 제품에 대한 정의
잡스가 좋아했던 과목 중에 캘리그래피 수업이 있었다..(중략).. 잡스는 그 수업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 수업에서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를 배웠고, 글자를 조합할 때 글자 사이 공간을 조절하는 방법, 조판을 멋지게 구성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배웠지요. 과학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심미적이고 역사적인 무엇, 예술적으로 미묘한 무엇을 느낄 수 있는 수업이었어요.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과 예술, 그리고 철학적인 고찰입니다. 애플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성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제품이 인기였습니다. 소니, HP 등이 그 예시죠. 하지만 결국 예술과 가치를 겸비한 애플에게 점유율을 내주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초기 (적어도 소프트웨어) 시장은 기능 중심으로 제품을 만듭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며 시장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예술과 철학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회의감을 느낍니다. 오로지 돈을 위해 제품을 개발하고, 광고수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이를 인디해커 문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했을 때 장기적으로 그 결과가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
Not Boring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있는 Allen의 글이 이를 잘 설명한 것 같아 요약해봤습니다.(https://www.notboring.software/words/no-more-boring-apps)
제품개발이 지나치게 공식화되고 지루해졌습니다. 모든 제품은 비슷한 템플릿과 프레임워크를 사용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창의성과 다양성이 부족합니다.
제품은 단순한 문제해결을 넘어 유저에게 영감을 주고 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합니다.
제품개발은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기술 산업의 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때문에 개성있고 창의적인 디자인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뭐랄까.. 우리가 중세시대 이후 르네상스를 건너뛰어 산업시대로 접어든 느낌입니다. 르네상스를 단순히 예술가들의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르네상스야 말로 인간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실용적 가치에 집중하며 산업시대의 기반을 다진 시기입니다.
만약 르네상스가 없었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 수 있어요.
종교적, 기계적 사고에만 매몰되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을 것
예술적과 과학의 조화로운 발전이 아닌, 단순히 기능적 진보에만 치중했을 것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합적 사고(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가 발전하지 못했을 것
인문학적 성찰이 없는 기술발전은 결구 인간성을 소외시켰을 것
이렇듯, 스티브잡스와 르네상스를 보면 예술과 철학의 가치가 얼마나 큰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품개발을 하고 있는 관점에서, 속도가 느리더라도 어떻게 하면 깊은 통찰을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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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워즈니악과 잡스의 차이
워즈의 아버지는 나아가 아들에게 지나친 야망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었다. 워즈가 잡스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늘 제게 중요의 도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스티브와 달리 상류사회로 치고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없었습니다. 제 꿈은 그저 아버지처럼 엔지니어가 되는 거였습니다. 부끄럼도 많이 타는 성격이었기에 스티브처럼 기업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4년전, 국내 스타트업 씬에 전례없는 양의 자본이 유입되면서 제2의 스티브잡스, 제2의 OOO을 꿈꾸며 창업한 사람들이 급증했습니다.
하지만 돈과 성장에 집착하는 한국의 특성상 이런 분위기는 무언가 하나를 진득하게 고민하는 것의 가치를 낮췄습니다. 당시 주변에서도 학문을 포기하고 큰 성공을 위해 이커머스, 자영업, 소프트웨어 창업에 뛰어드는 사람을 많이 봤는데요. 적어도 한국의 이런 분위기는 워즈니악 같은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았을 겁니다. 그저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사람들 말입니다.
현재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워즈니악 같은 사람들로부터 편안함을 느낍니다. 한 가지를 오래 붙잡고 고민하면서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열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지금, 저는 이걸 가장 잘 시도해볼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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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잡함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그는 이렇게 설파했다. “그게 우리의 접근 방식입니다. 매우 단순한 스타일. 우리는 실제로 뉴욕의 현대 미술관에 전시될 만한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운영 방식, 제품 디자인, 홍보, 이 모든 것이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단순하게 가자. 정말로 단순하게.” 단순함이란 궁극의 정교함이다.
월터 아이작슨은 잡스의 지성을 “인문학적 감각과 과학적 재능이 강력한 인성 안에서 결합될 때 발현되는 창의성”이라 평가했습니다. 강력한 지성은 상반되는 개념을 모두 이해한 상태에서도 제대로 동작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처럼 과학만 가지고, 인문학만 가지고는 복잡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상반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취급해야하는데요, 이걸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이 제품개발입니다. 인문학과 과학을 동시에 추구하며 살고 싶으신가요? 그럼 끊임없이 제품개발을 하면 됩니다. 인문학은 꿈을 꾸게 만들고, 과학은 그 꿈을 현실로 가져오니까요.
마지막으로, ‘강력한 인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개인마다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받아들여집니다.
모든 현상에는 그 너머의 본질을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돈을 버는 것 그 이상의 멋진 무언가를 창출하기.
나의 모든 행동을 인류 발전 과정의 일부로 바라보기. 좋은 삶을 많은 자원의 수집이 아닌, 줄 수 있는 영감의 총량으로 평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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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훌륭한 수확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린 나이에도 리사 브레넌(잡스의 딸)은 음식에 대한 잡스의 강박증에 그의 인상철학이 반영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즉, 금욕주의와 미니멀리즘이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든다는 철학 말이다. “아버지는 훌륭한 수확은 척박한 자원에서, 즐거움은 절제에서 비롯한다고 믿었어요.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공식을 알고 있었어요. 모든 것에는 반대급부가 따른다는 것 말이에요.”
전자기기와 떨어져지내면서 5권의 책을 3주동안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활자가 주는 즐거움이 컸는데, 다양한 출처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정보로부터 독립해 깊이 있는 글과 이야기를 읽다보니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예전에 COOV(전자예방접종증명서 앱)를 개발하셨던 재훈님을 만나 평소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일할 때는 주변환경을 강하게 통제하지만, 길을 걷거나 일하지 않는 이외의 시간에는 Randomize한 요소들에 최대한 집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길거리에 보이는 간판, 음악, 사람들의 패션 등. 일상에서의 강한 통제는 여러 영감들을 더 잘 인지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SNS의 등장으로 군중심리가 전례없이 강해진 요즘, 감각에 대한 예민함은 엄청난 자원이자 역량입니다. 인간의 주의력(attention)은 유한한 자원이기 때문에 이를 원하는 순간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이 복리로 쌓일 때 비로소 최고의 지성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5. 요즘 읽는 책
유발 하라리의 신간이 나왔습니다. 훈련소에서 옆 동기가 읽던 것을 훔쳐봤었는데 역시 재미있어서 나오자마자 서점에서 구입했네요. 당분간은 그동안 못 읽었던 책들을 몰아서 볼 생각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