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부터 1월 3일까지의 독일 여행 일지를 정리해봤다. 필름 사진을 200장 가까이 찍었는데, 전부 스캔하고 일지를 적느라 조금 늦어졌다. 14일간의 기록이지만, 인상깊은 순간만 추렸다.
사진이 아주 많다. 자루하지 않게 독일 여행을 하면서 들었던 노래들을 중간중간 넣었다.
Feels like - Gracie Abrams
1. 인천공항 푸드코트,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한인민박
해외로 출국하기 전에 한식에 정을 떼고 싶다면 인천공항 푸드코트를 가면 된다. 최후의 식사로 차돌된장을 골랐는데, 장담하지만 저건 물 탄 뚝불에 가깝다. 첫 입을 먹었을 때는 후회했지만 덕분에 독일에서도 한식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해외로 나갈 때는 한국을 잠시 잊으라는 인천공항의 깊은 뜻인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에는 6시쯤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도착한 중앙역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멋진 기차들이 많았고, (마)약을 사고파는 사람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다 그대로였다. 오랜 비행 시간에 지친 나는 대충 구운 오리가 들어있는 Asian snack box 하나를 포장해서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제이시앤블루라는 한인민박을 잡았다. 도미토리라 가격이 저렴해서 잡았는데 생각보다 시설은 기대이상이었다. 숙소 위치도 중앙역에서 1분거리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도 좋았다. 특히 숙소 안에 있는 북카페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지금까지 여행 다녀본 곳 중에서 노트북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Day 1은 비행기를 타기 위한 이른 기상, 장시간 비행의 이유로 일찍 잠들었다.
2. 크리스마스 마켓, 괴테 생가, 서점
이날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먼저 크리스마스 마켓을 갔다. 독일은 공휴일에 진심인 편이라 크리스마스 마켓이라 하면 25일까지는 해야할 것 같지만.. 이날(21일)까지만 마켓이 운영되었다. 잠도 잘 잤겠다 마켓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만약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에 갔다면 딱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화장실 위치 알아두자. 막상 필요할 때 찾으려면 못 찾는다
소세지와 맥주 가격은 거기서 거기. 줄 적게 서는 곳으로 가자
사고싶은 것이 있더라도 마켓을 한 바퀴만 돌아보자. 여기서 파는게 저기서는 더 싸게 판다
사람이 너무 많아 휴대폰이 터지지 않을 수 있다. 지인과 함께한다면 손 꼭 잡고 다니자
나는 독일 특유의 적당한 개인주의가 좋다. 배려해야할 때는 철저하게 배려하고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개인주의적이다. 특히 여러인종이 섞여있는만큼 사람들이 나와 다른 문화나 사람들로부터 크게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켓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보기 좋았다. 한국이었다면 아이들이 사고를 칠까봐 ‘안돼‘를 외치는 부모님들이 태반이었을 것 같은데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사회가 조금만 긴장을 풀고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순간이었다.
소세지를 파는 어떤 아저씨랑 대화를 나누다가 크리스마스 마켓은 밤이 가장 예쁘다는 말을 듣고 저녁까지 주변을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그리고 주저없이 괴테생가를 찾아갔는데 혼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철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이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봤는데, 우선 어렸을 때부터 긍정적인 자극이 정말 많은 것 같다. 집에만 있어도 장군, 화가, 음악가 등과 같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많은 것을 배우고 흡수하는 유년기 시절에 다양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예술을 배운다. 음악과 미술을 필수로 하는데, 유년기 시절의 예술은 창의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것에 도움을 준다. 덕분에 자신의 다면적인 생각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나아가 자신이 무엇을 감각하고 있는지 잘 알아차리는 힘을 기르게 된다.
책에 많이 노출되는 것 또한 인상깊었다. 활자를 읽는다는 것은 굉장히 자기주도적인 행위인데, 문장을 시작하거나, 단어와 단어 사이를 건너뛰거나, 마침표가 있을 때 읽는 것을 멈추는 것 모두 우리가 주도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는 병렬적으로 머릿속에서 장면을 상상하며 읽게 되는데,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꾸준히 해오면 학습/인지 능력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철학은 예술, 수학, 문학 등의 학문의 종착역 같다. 요즘 제너럴리스트라고 부르는게 당시의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 그럼 나는 이런 학문들에 요즘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그렇게 생가를 둘러본 다음, 근처 서점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책을 많이 봤는데, 독일이라 그런지 산업 디자인과 관련된 책이 많았다. 이것저것 읽어보다가 IBM ThinkPad를 디자인한 Richard Sapper, 현대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친 Dieter Rams의 책을 샀다. 혹시 전기에 관심이 많다면 Phaidon Press의 책들을 보면 좋을 것 같다. 묵직한 무게와 많은 사진들 때문에 절대 가격은 저렴하지 않지만, 한 사람의 네러티브를 정말 잘 표현한다.
밤에 다시 마켓을 찾았다. 같은 숙소에서 지내던 사진작가(이하 사진 형), 영국 유학생 분들과 맥주랑 소세지를 먹었다. 사실 밤늦게 놀고 싶었는데 시차 적응이 전혀 안되었는지 8시가 넘어가니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숙소로 일찍 들어와 기절했다 ㅋㅋ
3. 카페, 플리마켓
하루는 사진 형과 주말에만 열리는 플리마켓에 갔다. 베를린에 마우어마켓이라는 곳이 있는데, 예전에 이곳해서 했던 경험이 아주 좋았어서 기대를 많이 했다. 하지만 보자기 위에 물건들이 난잡하게 놓여져있는 것을 보고 실망이 컸다.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전자제품와 필름카메라가 비를 맞아 다 젖어있었다. 필름카메라 하나 건지려고 갔는데 5분만에 후딱 보고 나왔다.
비오는 날에 걸어서 플리마켓까지 갔다가 기분까지 망친 나와 사진 형은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로 했다. 너무 배고픈 나머지 메뉴 3개를 시키자마자 순삭하고, 옆 가게에서 감자튀김 라지 사이즈까지 먹었다. 이렇게 탄수화물을 때려넣다보면 졸음이 올 수 밖에 없는데 이겨내기 위해 카페를 갔다.
마침 어제 산 Richard Sapper 책이 있어서 모처럼 여유있게 책 읽는 시간을 가졌다.
TMI지만 이날 적은 메모를 보니 여행 동반자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랑 정말 취향이 비슷한 형을 만났다. 취향과 관심사 모두 비슷해서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했고, 우연이 만들어준 이 관계가 생각보다 편하고 좋았다.
모든 시간을 나랑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휴식과 정비를 위한 시간 정도는 나랑 비슷한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여행 첫 날부터 만난 사진 형과는 일주일 내내 함께 다녔다. 지금은 아마 파리에 있을텐데,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3. 숲
Wash - Bon 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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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은 비가 엄청 많이 왔다. 원래 2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시골로 가서 하루종일 있을 계획이었는데 계획을 변경해 근처 숲을 가보기로 했다. 비가 어느 정도 그친 것을 보고 바로 트램에 올랐다.
이날 갔던 곳은 중앙역 앞에서 17번 트램을 타고 종점까지 가면 나오는 Frankfrut Stadtwald다. 전 세계 최대 녹지 면적을 보유한 이 시에서 가장 넓은 숲으로, 거대한 나무들과 호수가 있어 산책하기에 딱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자연에 온 날이었는데, 주기적으로는 힘들어도 자연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이었다. 겨울철에는 나무가 피톤치드를 적게 발산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냥 나무가 엄청 많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ㅋㅋ 덕분에 머리가 맑아지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빈 정류장에 앉아 생각을 몇 개의 메모로 적었다.
사람이 정신적/신체적으로 힘들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숨을 쉴 수 있는 자세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고개를 올려다볼 때 하늘이 보이는 도시와 그렇지 않은 도시의 행복 수준이 다르다고 한다. 정확히 어떤 인과관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 같다. 자연이 주는 위로는 대체 불가하고 그래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자연으로 가야하는 것 같다.
4. 뤼데스하임 포도밭, 파가니 클래식
다음 날에는 일어나자마자 중앙역으로 향했다. 드디어 뤼데스하임으로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딱 3년 전에 독일에서 독일의 교육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교육창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곳이 여기 뤼데스하임의 포도밭이었기 때문이다.
뤼데스하임은 정말 작은 도시다. 빠른 걸음으로 반나절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정말 많다. 누군가 뤼데스하임을 간다고 하면 가장 먼저 포도밭에 가라고 하고 싶다.
괜히 3년만에 이 자리에서 다시 강을 내려다보는게 감격스러워서 혼자 짧은 브이로그를 찍었다 ㅋㅋ 그리고 그냥 찍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올해의 회고와 3년 뒤에 다시 여기에 오기 전까지 어떤 것을 이뤄놓을지 영상 속에서 다짐했다.
나의 context를 지닌 장소가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 같다. 마치 위치좌표가 암호로 걸린 다이어리처럼, 정확히 그곳에 갈 때마다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 있다. 살면서 이런 곳을 찾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려오는 길에 이 차를 봤다. 살면서 건강한 엔진을 가진 파가니 클래식을 볼 확률? 0에 수렴할 것 같은데 이걸 봤다. 아마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파가니라는 차가 어떤 차고, 굴러다니는 파가니 클래식을 본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게다가 덩치 좋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타고 다니니 더 멋있어보였다 ㅋㅋ
뤼데스하임이 시골이라 그런지 막차가 이른 편이다. 아쉽지만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3년 뒤에 꼭 다시 올거다.
5. HNY, 불꽃놀이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기대하고 있던 이벤트가 새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새해 카운트다운은 꼭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독일의 연말연초에는 특징이 있는데, 그냥 길 가다 폭죽을 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의 폭죽을 사람한테 쏴서 인명피해가 나지만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폭죽을 쏴도 괜찮은 것 같다. 길을 걷다가 처음 폭죽 소리를 들었을 때는 총기난사-실제로 당시 유럽에서 테러가 많았다-가 일어난 줄 알았으나, 계속 들으니까 적응됐다.
알고보니 독일에는 1월 1일에 가장 먼저 폭죽을 쏘아올리는 사람의 소원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연말부터 폭죽을 판매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쏘아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 숙소 사장님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갈 때 마인 강에서 불꽃놀이 파티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이게 지자체 같은 곳에서 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각자 폭죽을 사서 쏘아올린다는게 특징이란다.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고, 12월 31일 11시쯤 마인강으로 다같이 나갔다.
그리고 아래의 영상을 찍었다.
정말 사방에서 폭죽이 날라온다 ㅋㅋ 잘못하면 죽는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자세히보면 마인강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도 폭죽을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도많은 폭죽이 쏴지다보니 몇 개는 사람들 사이로 날아와 터지기도 한다.
내년 새해도 독일에서 보내면 좋을까.
6. 사진공부
알게 모르게 사진이라는 단어와 참 연결이 많았던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200장이 넘는 필름사진을 우연히 여행길에서 만난 사진작가 분과 찍었고, 여행 기간동안 가장 많이 읽은 Phaidon press의 책 역시 무드있는 사진을 책 내용과 잘 삽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도 많은 context를 담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스토리지 같다. 무게도 가벼운데 담겨있는 정보는 진짜 많으니까 가성비 맞는 것 같다. 또 평소에 찍어둔 몇 장의 사진들이 나를 살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피곤하거나 힘들 때, 예전 생각을 할 때 사진을 보면서 다시 힘을 얻거나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사진을 제대로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과 사진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살 때 일, 나, 사랑 중에서 ‘나’와 ‘사랑‘을 잘 키워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래는 여행 기간 동안 걷다가 찍은 필름사진들 중 몇 개를 넣었다.
7. 마무리 Danke!
독일로 떠나기 전에 썼던 글이다. 크게 영감과 휴식, 지적 성장, 신체적 성장에 대한 계획이 있었는데, 신체적 성장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잘 달성한 것 같다.
독일에 있으면서 크게 몇 가지 생각을 했다.
나의 색을 유지하는 일은 너무 중요하다. '멋진 사람'을 따라하는 일은 성장할 때 빠른 지름길을 제공하지만, 그 사람과 나는 비슷한 색을 지녀야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모두 고유의 리더십 성향/타고난 역량 등을 가지고 있고, 이런 것들은 따라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보고 배우는 것은 나의 강점과 약점 그 어느 것도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합을 잘할 수 있어야한다. 각자가 가진 색이 있음을 인정하고 어떻게 섞일 수 있을지 고민해야한다.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긴장을 풀고 여유를 더 가질 수 있어야한다.
적어도 문학, 예술, 수학을 끊임없이 가까이 해야한다. 보통 세 분야를 가까이한 사람들은 훌륭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거에는 이걸 통달한 사람을 철학자라고 불렀다. 제너럴리스트인 셈이다.
내 주변의 것들을 더 사랑하고 감사함을 느껴야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anke :)
흠.. 사진을 왜 이렇게 잘 찍는거죠???